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크 왕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 >불가르 군대에게 패배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원로원과 군대는 스타브라키오스의 매형 미하일 1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이 크게 악화되자, 그간 로마인의 황제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비로소 자타공인 황제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2 (이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이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812년 비잔티움 제국 사절단이 [[아헨]]에서 카롤루스를 [[바실레프스]]로 인정함으로써 세계에는 다시 한 번 동방과 서방의 로마 황제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2 ''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2 ''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169-170쪽 [[동로마 제국]]과는 미묘한 애증의 관계였다. 초대 왕인 [[클로비스 1세]]가 [[아리우스파]]가 아닌 칼케돈파 정통 기독교를 택함으로서 다른 게르만족과는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기뻐했지만, 이 사실로서 동로마 제국에 순종적인 게르만 왕국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한 연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동로마 측과 달리, 프랑크 왕국은 일찌감치 서로마 지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야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고트 전쟁]] 때 프랑크 왕국에 친서를 보내 같이 아리우스파를 몰아내자고 제안했지만, 정작 프랑크 왕국은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개입을 저울질하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했고, 급기야 [[나르세스]]와 군사적 충돌을 하기까지 했다. 기본적으로 프랑크 왕국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양쪽은 크게 얽힐 일이 없었지만, 8세기 들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점차 서방에서 축출되고, 그 틈을 프랑크 왕국이 메우면서 긴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일단 로마의 발상지이자 이 당시에는 동로마 영토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중부 이탈리아를 [[피핀 3세]]가 멋대로 교황의 사유지로 만들어버렸기에 사이가 틀어졌으며, 이후 카롤루스가 동로마의 봉신국이던 베네치아와 직할령인 남부 이탈리아까지 노리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표면적으로나마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 자리를 수여하였고 카롤루스가 당시 동로마 여제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동로마 황제 자리까지 노리면서[* 이리니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귀족들에 맞서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던 것이었겠으나, [[살리카법]]에서 알 수 있듯이 [[게르만족]]중에서 프랑크족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작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눈으로 보면 동로마는 그냥 황제 자리가 빈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리니는 그 이외에도 [[서로마 제국]] 작위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자,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로 동서로 나뉜 [[로마 제국]]의 재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착각한 것도 있었다. 물론 로마인들은 이리니를 그냥 병신 취급했다...]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입장은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제위를 동로마 제국에게 바쳤기 때문에 자신들이 동서로마 황제 자리를 동시에 보유한 로마 제국이며, 따라서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은 자신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로마 분할통치 원칙에 따라 어느 한쪽의 황제가 비게되면 그 황제위는 자동으로 종속이되니 서로마 황제위는 자동으로 동로마에 종속되는게 맞다.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로 서명을 대신하는 무식쟁이 게르만인이 로마 주교와 결탁하여 멋대로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고 생각하여[* 사실 카롤루스 마뉴스는 분야가 좀 달랐을 뿐 결코 무식한 왕은 아니었고, 정말로 문맹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자존심이 상한 동로마인들은 자기들 황제가 아예 황제 자리를 넘겨주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폭발하여 이리니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로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한 다음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베네치아와 아드리아 해를 중심으로 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카롤루스는 막강한 경제력과 해군력을 가진 동로마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더이상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유능한 아들만 하나 잃게 되었다. 동로마는 동로마대로 북쪽 국경에 나타난 신흥 세력 [[제1차 불가리아 제국|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니키포로스 1세]]가 술잔이 되어버리는 참극을 겪으면서, 멀리 떨어진 프랑크 왕국보다 직접적으로 제국을 위협하는 불가리아를 더 큰 위협으로 보게 되었다. 이 시기 제국으로 거듭난 카롤루스의 세력은 이미 혼란기를 겪고 있던 동로마를 인구 수에서 추월하는 등 무시 못할 세력으로 거듭난 지 오래였으므로, 대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동로마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양측은 전쟁 전 세력권을 그대로 유지하며, 동로마 입장에서는 멋쩍지만, 로마인의 황제라는 카롤루스의 칭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카롤루스는 자타공인 황제가 되었다. 물론 동로마는 대내적으론 카롤루스를 동등하게 보지 않았으나, 대외적으로는 '두 명의 황제'라는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앖았다. 이후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두 나라는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어 소멸할 때까지 친교를 유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